잡지기고,‘입장’ SPACE, No.525, 2011.08
An Article, ‘Position’, Magazine SPACE No.525, Aug. 2011
立場 POSITION
SPACE는 개제될 건축 작품의 선정을 기자가 아니라 건축가를 통해 결정하겠다며 이 방식을 피어리뷰라고 했다. 물론 최종적인 판단은 SPACE에서 한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이 방식의 선택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전문잡지란 ’전문‘으로 분류되는 대상을 통해 주관적으로 평가하거나 반응하며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 행위를 자신이 아니라 타자에게 이양하므로 서 마치 그 주체적 입장을 갖지 않거나, 있다하더라도 외부로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PACE는 건축 작품의 선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가까이서 찾는다면 피어리뷰를 통해서 건축가가 평가한 작품을 SPACE가 다시 결정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리뷰하는 건축가의 역할은 또 다시 애매하다.
선택하는 사람의 입장
내가 아는 어느 인문학 교수는 자신이 속한 학회로부터 한 달에 한 번꼴로 의뢰되는 논문심사 때문에 곤란스러워 한다. 바쁜 시간을 쪼개는 것도 어렵지만 일정 기준에 못 미치는 논문을 심사했을 때 평가된 결과를 논문 작성자에게 전해주어야 하는데 회원의 대개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며 어떤 경우는 해당 논문이 반드시 통과해야 교수로서의 일정의무를 마치는 마지막의 케이스임을 알고 논문을 심사해야 할 때가 있어서라는 것이다. 개인적 관계를 생각한다면 후한 평점을 주고 싶지만 평가하는 자신의 명예와 학회의 논문 퀄리티를 생각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개인의 입장은 난처해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 본다면 대개의 사회적관계가 이러하므로 이 방식의 논문평가 제도는 나름 유효해 보인다.
그렇다면 SPACE가 건축 작품의 선정할 때도 이런 방식의 적용하여 여느 학회나 다른 아카데믹 단체와 비슷하게 논평의 결과를 작품게제에서 제외된 건축가에게 전해주는 것도 괜찮을까?이 문제에 대한 선택은 순전히 SPACE의 몫이겠지만 논문 심사의 경우는 그런 평가방식에 대해 평가자와 논문작성자가 사전에 동의했다는 점과 논문의 수준을 일정하게 통제하려는 공동체적 합의라는 점에서 다르다. 다시 말하면 건축가들은 SPACE 혹은 SPACE에서 위촉한 건축가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에 크리틱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작품 개제에 대한 잡지사의 입장을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입장은 YES 혹은 NO가 깔끔하다.
선택받는 사람의 입장
많은 건축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SPACE에 개제하고 싶어 한다. 그중에는 발표가 허용된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수의 건축가들이 거절된다. 지면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선택된 사람들은 ‘나 요번에 공간에 나온다.’라면 자랑하지만(내 경우임) 거절당한 사람은 ‘짤렸다’며 강도 높게 서운해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내 경우임) 더러는 자신의 작품이 다른 건축가에 비해 모자라지 않은데도 개제에서 제외된 것은 선정의 기준에 문제가 있다고 성토하거나 입시에서 낙방이라도 한 사람처럼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도 있다. 자부심에 훼손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잡지도 여럿인데 이렇게 상처까지 받으면서 굳이 SPACE를 통해 개제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간이라는 공간을 통해 발표되는 것 자체를 탐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작품에 SPACE라는 권위로운 루트로 발표되길 원하기 때문이며 비록 거절된 다해도 그것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객관적 커트라인 아니라 입장차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기분은 나쁘지만.
SPACE의 입장
SPACES는 피어리뷰 방식을 통해 잡지사가 취하기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본다. 권위로움으로 연결되는 권력보다는 공정함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고무적인 일이며 드문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결정이 입장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말 못 할 형편을 말하지 않으려고 선택한 방식이거나 건축가들이 선택한 것이라며 곤란함을 피하는 카드로 쓰일까 우려스럽다. 선택의 주체를 다자화하므로서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모호성의 편리함을 암암리에 서로가 묵인할까 싶다는 것이다. 입장이란 신념에 대한 표현이지 평균적이거나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을 없을만한 기막힌 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선택이란 어쩔 수 없이 거절을 수반하는 것이며, 거절이란 주관적 입장을 동반할 때 그 상대로부터 수긍되거나 혹은 수긍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입장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무사無事한 일인데 잡지가 이것을 허용한다면 스스로 불임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옛날 한 젊은이가 어렵게 농사를 지어 자신을 공부시킨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는 대학을 구경시켜드렸다고 한다.
“어머니 여기는 공과대학 건물이고요, 저기는 학생회관이고, 또 저기는 총장님이 계시는 본관이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근데…근데 말이다. 네가 다니는 대학은 어디에 있니?”
마찬가지로 어느 누가
“공간은 어딥니까?”라고 묻는다면 “바로 여깁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