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아도니스의 빛과 어둠’ 월간, 함성호, C3 Korea 0304 No. 224., 2003

Critique, ‘The Light and Darkness of Adonis’, Ham-sungho, C3 Korea 0304 No.224., 2003

아도니스의 빛과 어둠

함 성호 (시인,비평가)

이 글에는 처음부터 한 가지 한계가 노정되어 있음을 먼저 고백해야 한다. 그 한계는 건축의 공간이 언제나 그 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김재관의 교회건축을 다루는 이 글에 있어서도 그것이 교회라는 사실은 그 건축을 얘기하는데 있어서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다루게 될 김재관의 세 교회건축의 공간(충신교회, 성만교회, 대흥교회)을 얘기하는데 있어 그것이 교회라는 특정한 용도를 갖고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도외시하고자 한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째는 나는 김재관의 교회건축을 살펴보고 싶은 게 아니라, 김재관의 건축을 그의 교회작업을 통해 살피고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작업이 주로 교회건축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종교건축은 건축가의 이상화된 공간을 가장 추상적으로 표현 할 수 있는 적절한 대상이다. 따라서 거꾸로 종교건축은 한 건축가가 지향하는 건축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세세히 지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은 파라다임이 된다. 그러나 김재관에게 있어 종교건축이란 건물의 용도는 단지 하나의 빌미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리버럴한 종교적 신념이 그의 교회건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김재관에게 있어 건물의 기능은 절대적으로 공간의 순수성에 복무한다. 김재관에게 있어 그 순수성은 빛과 빛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이야말로 건축가 김재관의 종교성이다. 이것이 두 번 째 이유가 된다. 그에게 있어 교회건축의 파라다임은 빛 하나로 통한다. 동시에 이것이 그의 건축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모더니즘과 모더니즘 이후의 사이

빛은 건축예술에 있어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온 한결같은 주제이다. 김재관에게 있어 이 빛의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서 그렇게 특별 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김재관 건축에 있어서 이 빛에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에게 있어서의 빛은 상징과 은유가 아닌 구체적인 인식의 문제이고, 구축의 방법을 바꾸는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빛은 신의 말씀을 상징하지도 않고 말씀의 나라를 이루는 은유도 아니며, 한 예술가의 초월적 지향점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빛은 기필코 요리해내야 하는 도마 위에서 살아 펄펄 뛰고 있는 생선과 같다. 또 그것 때문에 그의 구축의 방법들은 처음부터 일정한 공식을 가지고 진행된다. 생각해 보라, 지금 우리의 건축 기술로서 건축에 빛을 끌어들이는 문제를 생각 할 때, 더군다나 상징과 은유를 걷어 치웠을 때, 얼마나 뻔한 것이 겠는가? 사실 김재관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빛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진부하다 못해 고루하기까지 하다. 그의 처녀작인 강정교회에서부터, 충신교회, 그리고 계획안인 대흥교회에 이르기까지 그 진부함은 오히려 그렇게 지속적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이다. 예배당 천정의 가장 자리를 돌아가면서 뚫어 놓고 천정에서 자연채광이 쏟아지게 만드는 것이 그의 묘기의 전부이다. 그것은 줄기차게 그의 작업 거의 전부를 통해 되풀이된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런 고집, 혹은 막무가내인 베짱을 부리는 것일까? 분명 김재관은 재기에 넘치는 건축가는 아니다. 이 말은 그에게서는 넘치는 재기를 찾아 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가끔 김재관은 ‘직관’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그가 쓰는 직관이라는 말에서 ‘논리를 넘어 선 타당성’이라는 개념은 적당하지 않다. 그의 직관은 논리를 넘어선 타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타당성 이전에 반드시 ‘설명되어야 하는 논리’에 더 가깝다. 그것이 타당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늘 보여지는 단조롭고 평이한 수법들은 그렇지 않은 다른 방법들에 대해 “도대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라고 묻고 있는 것 같다. 거기에 대한 설명을 마련하지 못 할 때 그는 그런 방법들에 대해 주저없이 반대편에 선다. 설명 가능한 진부함을 택할지언정 설명하지 못하는(‘설명 될 수 없는’이 아니다) 재기는 그의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마도 4·3그룹 이후의 세대들 중에 가장 충실한 모더니스트일지도 모른다. 설명 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으며, 꼭 설명해야 하는가?란 인간 인식의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며 나온 4·3그룹 이후의 세대들이 보다 자유로운 건축의 방법들을 개진할 때 김재관은 같은 세대들을 불만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한 젊은 작가의 진중한 태도로 치사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같은 세대들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보고 있다는 것은 동시에 선배 세대들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그의 작업에서는 굉장한 비약이 이루어진다. 그의 평면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극히 간단하다. 간단함은 복잡함을 지워 나간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김재관에게 있어서는 처음의 생각을 전체로 확대해서 시종일관 밀고 나가 결국에는 관철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렇듯이 그의 건축은 온통 빛에 대한 비약으로 가득하다. 물론 그 비약의 대상은 말 할 것도 없이 타당성 이전의 설명되어야 하는 논리로서의 직관이다. 이 직관이 그의 작업을 모더니즘에서 분리시키고 모더니즘 이후와도 일정한 거리를 만들게 하는 주된 요인이다.

빛이 있으면 당연히 어둠도 있다. 김재관 건축은 항상 어둠에서 빛을 향하고 있다. 그의 건축이 빛과 어둠을 번갈아 가며 살아내듯이 그는 항상 모더니즘과 모더니즘 이후의 사이에서 양자를 견제하며 자신의 건축적 삶을 일궈내고 있다. 충신교회는 보다 어둠에 다가가서, 그리고 성만 교회는 보다 빛쪽으로 나아가서.

복도를 걷는 무의식의 발걸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도니스는 시리아의 왕 테이아스와 그의 아름다운 딸 스미르나 사이에서 태어난 청년이다. 그러니까 아도니스는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났다. 아도니스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동시에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동시에 누나가 되는 셈이었다. 신화에 의하면 아도니스는 1년 중 넉달은 지하에서 살고, 넉달은 지상에서, 그리고 넉달은 혼자서 사는 거주의 제한을 받게 된다.1) 아도니스라는 이름은 주인을 의미하는 아돈adon이라는 경칭에서 유래하는데 그리스인은 멧돼지(시리아인에게는 신성한 동물이다)에게 살해된 아도니스에게 풍년신의 생성과 소멸을 대입하고 있다.

1)평소에 테이아스 왕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자기 딸 보다 못 할거라고 딸의 미모를 칭찬하였다. 이에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에게 명하여 스미르나에게 사랑의 금화살 한 대를 쏘게 했다. 화살에 맞은 스미르나는 아버지에게 견디지 못할 정도의 욕정을 품게 되었고, 결국 그녀는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동침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딸의 임신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기의 아비가 누구냐고 물었고, 그게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왕은 창피하고 분한 마음에 칼을 뽑아 딸을 죽이려고 했다. 이때 아프로디테 여신이 스미르나를 몰약나무로 변하게 했고 아프로디테는 몰약나무 둥치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를 꺼내 상자에 넣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지하세계로 데려가서 페르세포네에게 맡겼다. 이 아이가 아도니스인데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면서 페르세포네와 아프로디테 두 여신은 아도니스를 사이에 두고 연적이 된다. 이에 중재에 나선 제우스는 아도니스에게 1년 중 넉 달은 페스세포네와, 넉 달은 아프로디테와 그리고 나머지 넉 달은 아도니스의 자유의사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한 번 아프로디테에게 간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가 가지고 있던 케스토스 히마스(마법의 띠)로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어 페르세포네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의 정부인 전쟁의 신 아레스가 변한 멧돼지에 의해 사냥하다가 죽게 된다.

아도니스는 나무의 몸에서 태어나 지하에서 키워지고 지상에서는 마법에 걸려 다시는 지하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니까 지하를 벗어나자마자 아도니스는 마법에 걸려 예정된 자신의 운명을 살지 못하고 만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이라는 것이 사실은 마법에 걸린 최면 상태라면 아도니스는 한 번 지하를 떠난 이후 다시는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처럼 김재관의 건축에 있어서 빛은 우리 의식의 어떤 명징한 순간처럼 밝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늘 마법에 걸린 최면 상태처럼 벽을 타고 축축 흘러내린다. 그래서 슬라브는 떠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리 위를 육중하게 짓누른다. 천정과 벽의 틈새로 내려오는 빛은 건물 전체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그래서 빛은 축제가 아니라 어둠의 일부처럼 보인다. 충신교회는 이러한 건물의 하강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본당의 시멘트 뿜칠로 마감된 벽은 천정에서 내려오는 빛의 속도를 저지하면서 흘러 대지를 뚫고 내려가 그대로 지하의 식당과 복도에까지 가 닿는다. 이 장치를 위해 지상에는 내부, 외부에 여러 개의 오프닝이 준비되어있고, 벽은 단조로운 박스로 굳건하게 닫혀있다.

그래서 충신 교회의 지하복도는 우리에게 들여다보기 싫은 무의식의 공포를 생각나게 한다. 완전히 폐쇄된 길도 아니고, 빛이 이정표가 되는 길도 아닌, 이 지하 복도는 두 개 층 이상의 오프닝으로 실제 깊이 보다 더 과장되어 보인다. 우리는 이 길을 가면서 마치 저 끝에서 전혀 생면부지의 심문관과 맞딱뜨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충신 교회는 그 막연한 불안으로 끝나지만 그 불안의 정체는 대흥교회에서 드러난다. 대흥교회의 2층 로비에서 주방과 사무실로 둘러싸인 복도를 통해 식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식당 너머의 빛에 의해 이 긴 무의식의 터널을 통과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2) 만약 대흥교회의 식당이 식당의 용도가 아니라 소예배실 정도로 계획되었다면 이것은 그대로 종교적 성숙의 단계를 상징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듯이 김재관의 복도는 점과 점을 잇는 이동의 수단이 아니라 점과 점 사이의 또 다른 점이다. 만약 무속의 제의가 그러하듯이 억압이 없는 종교적 심성이 없다면 김재관의 이 복도는 저 아도니스가 두고 온 지하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건축적으로도 분명히 그 불명확한 어둠에 놓여있다.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우리는 그 복도의 끝에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복도에 관한 한 충신교회의 실패를 대흥교회가 극복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비록 대흥교회는 계획안이긴 하지만 김재관의 건축적 이상과 종교적 이상을 잘 통합하고 있는 건물이다. 무조건(그는 이런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대지에 박스를 두르고 그 안에서 시작하는 그의 작업 과정에 비추어 볼 때도 주변의 부정확한 대지를 오히려 간명한 선으로 자르고 대비시켜 한 변의 길이가 80미터 남짓한 거대한 박스가 오히려 그 긴 장축의 길이로 인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죽음과 사랑의, 구별과 구분

더군다나 이 복도가 빛의 문제에서 파생된 결과임을 볼 때 김재관이 추구하고 있는 빛의 정체는 더 분명해 진다. 충신교회의 경우에는 주로 본당을 중심으로 빛이 내려오지만 전체적으로 건물을 관통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김재관은 성만교회에서 건물 전체를 흐르며 내려오는 빛을 구상해낸다. 그 결과 성만교회는 두 겹의 박스로 계획되었고 빛은 그 사이에서 건물 전체로, 역시 느리긴 하지만 이전의 흐름과는 비교할 수 없게 건물 전체로 흩뿌려진다. 그리고 복도는 내부에서 외부로 돌출되어 역시 별개의 매스로 나타난 화장실과 엘리베이터실을 묶어주면서 독립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그 결과 평면은 지극히 단순해지면서 중심은 건물의 사면을 타고 흐르는 빛과 외피의 질감에 집중된다. 그리고 대흥교회에서 보여준 로비와 빛에 이르는 순서가 여기에서는 반대로 빛을 따라 하강한다. 즉, 4층의 중정에서부터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반투명 강화 플라스틱으로 둘러싸인 계단실의 또 다른 빛의 흐름이 건물을 내려오면서 보여지는 십자가까지 대흥교회의 역순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글쎄, 김재관은 그 두 방향성을 통합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성만 교회에는 대흥교회의 역순을 구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비록 지하는 없지만 강정교회에서와 같이 성만교회의 1층은 거의 지하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구조적으로는 아무 상관없는 두터운 벽돌 기둥을 일부러 만들면서 까지 빛의 수직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의도로 읽혀진다.

이렇듯 김재관이 보여주고 있는 흐르는 빛에 대한 천착은 철저한 구분과 구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구별은 다른 것들을 갈라내는 것이고, 구분은 일정한 목적을 위해 가르는 것이라고 할 때, 김재관에게 있어 후자의 기준은 빛을 만지기 위해서 행해지고 전자는 그에 따른 기능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행해진다. 그의 작업에는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의 모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건축의 간명함은 다분히 여기에 기인한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주변 환경과의 대응, 자연과의 조화, 콘텍스트 운운하는 건축 일반의 요구들은 그래서 무시되는 측면도 있다. 그는 철저하게 내면를 지향하는 건축가이고 그의 건축은 바깥에 관심이 없다. 그는 먼저 바깥과 대지를 구별하고, 건물의 피부를 구분하며, 실의 프로그램을 구별하고 배치한다. 교회건축의 특성상 분명한 공간의 위계가 물리적으로도 확정되어 있어서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김재관의 건축에서는 제우스에 의해 거주를 제한 받았던 아도니스적인 공간의 위계가 분명하게 있다. 아도니스의 죽음과 사랑은 자신의 고독에 의해 구별되고 제우스의 의도에 의해 구분된다.

김재관의 박스는 그래서 거의 동일하다. 충신교회와 대흥교회는 입면으로만 보면 매스만 늘려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박스는 조금씩 변한다. 강정교회와 충신교회에서는 이 박스와 주변을 연결하거나 시각적으로 완충해주는 외부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대흥교회와 성만교회에 오면 이 매개물은 싹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대신에 계단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점점 더 폐쇄적으로 되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에 따라 박스는 점점 더 견고해지고, 내부의 빛의 흐름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빛의 흐름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어둠의 농도도 짙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만교회는 마치 창자를 투명 비닐봉지에 넣고 다니는 병자처럼 코아를 전부 바깥으로 내놓으면서, 내부의 어둠과 벽과 벽 사이를 흐르는 빛의 흐름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가 벽과 벽을 마주보게 하면서 본 자신의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아프로디테를 빼앗긴 질투에 찬 아레스는 멧돼지로 모습을 바꿔 이빨로 아도니스의 옆구리를 찔러 죽였다. 애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프로디테는 그의 주검에 넥타르(神酒)를 뿌리고 꽃이 될 것을 축원했다. 그래서 피어난 꽃이 바로 ‘아네모네(anemone, 바람꽃)’이다.

결국 아도니스는 지하에 뿌리를 두고 지상에 꽃을 피우는 식물성으로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의 통합을 이루었을까? 아니면 끝끝내 그는 죽어서도 지하로 돌아가지 못해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기에 실패함으로 해서 마법에 취한 의식을 모르는 채 또 다른 마법에 걸려버린 것일까? 어쩌면 성만교회는 김재관 건축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여기에서 분명히 어떤 모종의 결론을 얻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무엇이든 작업을 하는 당사자야 말 할 수 없이 괴롭겠지만 그것을 보게 될 우리는 또 얼마나 행복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