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지역성의 파탄’, 탐라대학교 양상호 교수, 월간 C3 Korea 0105 No.201, 2001
Critique, ‘An Explode of Locallized Infection’, Prof. Yang-Sangho, C3 Korea 0105 No.201, 2001
정제되지 않은 시적 감성
양 상 호(탐라대 교수)
건물을 바라볼 때, 흔히 “만일 내가 건축가였다면 어떻게 하였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건물에 대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비평에 대한 대단한 생각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건축가를 대신하는 오만한 간섭을 종종 하게 된다.
시적 감성의 경계 : 명쾌와 모호
직선의 석축을 포함한 일직선의 진입로는 1층의 필로티 밑을 지나 마당으로 이어진다. 이 마당은 이전에 있던 단층 슬래브 건물의 앞마당이다. 엄밀히 말해서, 빈이네 집은 증측된 건물이다. 건축가 김재관은 감귤원 안에 증축계획을 한 것이다.
증축계획의 어려움은 기존의 요소를 어느 정도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빈이네 집에서 건축가가 함부로 해서는 안 죌 엄격한 조건은 기존의 단층주택과 두 곳의 석축이었다. 기존의 주택은 하나의 석축과 깊이 관계되어 석축의 연장선에서 구성되었으며, 또 하나의 석축은 이것들의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조건들은 건축주가 이 곳에 정착하여 감귤원으로 개간하면서 하나씩 이룩한 자신의 물건들인 것이다. 그 주택은 사별한 남편과의 애틋한 생활공간이었으며, 두 곳의 석축은 이 곳 감귤원의 지형을 결정지은 구조물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단충 슬래브 건물이지만 건축주에겐 소중한 주택이 출발점이 되어 작품은 연장되어간다. 기존의 건물벽선을 기준삼아 일직선으로 이어진 진입로는 다분히 건축가의 작품의지를 반영하는 듯하다. 곡선의 흔적이 전혀 없이 직교하는 직선만으로 이루어진 평면은 진입에서부터 건축가의 성격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이 진입로는 진입부에서 주택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이 아니라. 주택에서 비롯되어 진입부까지 이어진 일직선이다. 그만큼 기존의 주택은 건축주의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는 건드릴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일직선 진입로의 한 쪽 끝에 있는 주택은 무척이나 허전하고 지루한 상태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이 허전함과 지루함을 깨뜨린 것이 4개의 노출콘크리트 큐브를 가진 팬션건물이다. 일직선의 진입로에 직각으로 마주하여 기존의 질서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노출콘크리트가 갖는 재료적인 특성은 더욱 강인한 인상을 준다 과연 김재관다운 방식이다. 에너제틱energetic한 그는 기존의 질서를 자신의 작가적 질서로 전환시켜 새로운 질서를 탄생토록 한다. 진입축에 직교한 펜션과 다시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들어선 갤러리는 두 개의 석축이 이루는 각도 사이에서 살짝 틀어져 서 있다. 약 6도 정도인 이 비틀림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는 정도이기도 하다. 허나 작가는 이 미묘한 각도를 두 석축이 이루는 각도의 중간각도라 말하고 있다. 타다오 안도같은 작가는 비틀림의 각도가 명확한데 반해 그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에너제틱과 대비되는 숫기없는 성격에서 비롯된 모호함이 아닐까.
이러한 에너제틱한 명쾌성과 숫기없는 모호성은 몇 군데에서 더 발견된다. 갤러리의 몸체는 14개의 2.4m정방형 입면이 연속된 긴 입면체와 사다리꼴의 평면이 접합하면서 구성된다. 그 높이는 서로 다르다. 이는 광선과 전시동선의 확보를 위한 기능적인 처리방법이라 판단되지만, 입면적인 설명에는 모호함이 남는다. 2.4m의 정방형 입면, 즉 명쾌한 정육면체 7개가 비어있는 채로 연속되어 있는데 동선상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리 길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제작과정에서 입면상의 균형이나 축대를 강조하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의도된 형태조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비어있는 7개의 구조물을 헛간이라 말한다. 그러나 헛간치곤 경제적, 공간적으로 너무 비싸다.
또 남쪽 마당에는 새로 만든 연못과 기존의 건물 지붕슬래브가 나란히 놓여있다. 결과적으로 물, 흙, 콘크리트라는 이질적인 재료의 마당이 되고 있다. 재료들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지만, 이 마당의 성격은 모호하게 남는다. 아니, 이 공간은 마당이 아니라 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뜰이기엔 너무 개방적이어서 여전히 모호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기존 주택의 동쪽 마당이 더욱 명쾌하다.
이러한 모호성과 명쾌성의 이중성은 어쩌면 작가의 시적 감성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시적분위기는 절제와 은유에 의해 더욱 정도를 더하기도 한다. 그러나 절제와 은유에 의한 시적분위기의 경계선은 매우 민감하다. 시적분위기가 적당한 곳에서는 명쾌함으로 나타나지만, 지나친 곳에서는 모호함으로 나타나 버린다. 이 부분이야말로 언제나 작가의 고뇌가 서리는 부분이 아닐는지.
지역성의 파탄 : 장소와 세계관
제주에서는 대부분의 곳에서 한라산과 바다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라산이 배경이 되며, 바다가 전망이 된다. 바라보는 한라산은 대단히 완만한 경사의 능선을 하고 있다. 또 기생화산인 오름이라는 산들이 많다. 한라산과 오름의 능선과 제주초가의 지붕은 매우 닮아 있다. 전통지붕에 관한한, 한국의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내용일 것이다.
김재관의 건축에서 지붕에 대한 고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빈이네 집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한라산의 배경인 강정교회도 그의 작품이지만 사선의 지붕으로 그나마 능선을 표현하고자 했었다. 배경으로서 한라산이 펼쳐진 부지조건임에도 빈이네 집은 모든 지붕이 철저하게 수평선이다. 아마도 부지내의 조건에 최선을 다한 결과로 보인다. 부지 내의 조건이란, 한라산의 경사에서 비롯된 꽤나 급한 지형을 두 단의 좋은 석축으로 처리하여 평지를 만들고 있어서, 높은 석축이 만들어낸 직선의 하늘선 만이 건축가의 뇌리를 가득 메웠을 수도 있다.
또 제주만이 아니기에 그럴 수도 있다. 제주의 건축가들은 꽤나 지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오름의 능선을 닮아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붕에 대해서 따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 요즘같이 인공 환경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는 마당에 전체적인 조형의지에 따라 결정하면 그 뿐일 것이다. 능선을 그려보려는 노력이 어쩌면 어줍잖은 형태주의자의 순진한 조형의지일 수도 있다. 작가는 역시 자신의 조형의지를 표현하면 그만인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이네 집에서 지역 혹은 제주라는 특수성을 감지해 내기란 어렵다. 지붕에 대한 생각은 그렇다 하더라도, 일직선의 진입축은 제주라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올레라는 진입공간과는 배치되는 방법이며, 앞에서도 거론한 펜셩의 남쪽마당도 제주민가의 “안뒤”라는 특이한 공간과 어쩌면 가까울 수 있는데 안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 제주민가의 외부공간들은 돌담, 눌굽, 무영 등 여러 장치들에 의해 한정되는 독특한 위계와 아름다움을 갖는데, 빈이네 집에는 외부공간을 한정해 주는 요소가 부족하다.
건축가가 지역적인 특수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별 의미를 갖지 못할 지도 모른다. 또 이는 제주 출신이 아닌 건축주의 의식세계와도 관계없는 일이기에 가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지역성의 부재는 어쩌면 의식적인 귀결이 수 있고, 무관심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의식적이든 무관심이든, 건축주와 건축가의 세계관과 건축관에서 비롯된 일들이어서, 이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시간적인 방법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좁은 지역사회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가질 것인가 마음이 쓰이기에 조심스럽게, 혹은 오만하게 간섭을 할 뿐이다.
에필로그: 건축 중심적 세계관
건축을 계획할 때. 건축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건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실내에서도 건축은 아름다워야 하며, 안에서 밖을 보더라도 아름다워야 하며, 외부 혹은 멀리에서 건축을 보더라도 건축은 여전히 아름다워야 한다. 설령,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곳이 보이지 않게 하거나 경험하지 못하도록 계획되어야 한다.
실제로 그러한 생각을 실천하던 시기도 있었다. 바로크시대 영국에서 유행하던 픽쳐레스크 수법이 바로 건축 중심적인 세계관이. 이렇듯 건축을 중심으로 생각하다보면 건축 스스로도 의미와 미를 가져야 함을 깨닫게 된다. 로지에의 시대에 건축의 여신이 원초적인 오두막을 가리킴으로 건축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듯, 우리는 스스로 건축의 원초적 본질을 궁극의 지경까지 추구하고 생각함으로써 우리 건축의 새로운 가치관을 이룩할 수는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