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기고, ‘못된 버릇’, 건축과 환경 C3 Korea No.201, 2001.05

An Article, ‘some inveterate habit’, C3 Korea No.201, 2001.05

못된 버릇 

강정교회의 발표 이후 작업한 결과를 모아 정리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서른 여섯에 시작되어 마흔을 넘어가는 현재까지의 나의 궤적이기도 하며 그 이후 발걸음의 시작이기도 하다. 오래 전의 도면과 스케치를 통해 나의 생각들을 다시 만나면서 새로운 정리의 기회를 갖게되었다. 강정교회 이후 한 동안 다른 작업을 손을 대기가 어려웠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시작한 선마저 그 교회의 어느 언저리에서부터 그려지곤 했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연필을 놓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던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의 성과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많을 시간을 그 곳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심리적인 내성 때문도 아니다. 그것을 전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고의 범위와 색깔에 관계 있음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그 반복은 말 잇기처럼 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묻기조차 게을리 하는 습관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도 또한 같은 시기가 아닌가싶다.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몸까지 가벼이 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작업에 있어서 간혹 분석의 과정을 단축하는 못된 버릇이 있는데 그것을 직관이라고 부르길 즐겨해왔던 것 같다. 그 직관을 이루는 낱알들이 충실하지 못할 때는 내적인 허기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것도 매번 인색하지 않았던 같다. 그 결과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공간을 통해서 나타나 나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결과물들을 있게 한 최초의 단서는 무엇이며 그것을 답으로 선택하게 했던 사고의 바탕이 어떤 것인가가 중요할 듯하다. 사고와 행위를 얼마간 구분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던 그 결과들은 세 작업을 하나의 벽면에 모았을 때야 비로소 그 모습을 어렴풋이 나마 확인하게되었다.

그 작업마다의 상황과 배경은 사뭇 다르지만 그 각각을 관통하는 공통점으로 나타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지를 해석하는 나의 시각과 그를 반영하는 배치의 작법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부지란 집터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 범위는 넓게 확장되기도 한다.

토평교회의 배치에 있어 많이 고려한 것은 기존 어린이집과 신축되는 교회를 어떠한 관계로 설정할 것인 가였다.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의 구분방식 보다는 하이어라키라는 선형적 흐름속에서 포함하는 방식으로 안거리, 밖거리라는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매우 조심스런 일이다.

금촌교회의 설계를 내가 맡게됐을때 부지는 이미 그 원형을 상실한 채였다. 산을 평지로 만들려는 노력의 결과는 10여미터의 단절된 단면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고 그것이 설계의 조건이 되어 나에게 맡겨졌다. 나는 이것을 산이 있는 듯이 설계를 하기로 했다. 상처난 환부를 치료하고 끊어진 길은 핏줄처럼 다시 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건물의 배치에 결정적으로 작용되었다. 그 재생된 길을 통해 실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산으로 갈 것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효용보다 자연이 인간을 맞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의 일단은 제주의 빈이네 집에서 다시 시도되고 있는데 이것은 기존의 지형과 창고등을 개조하거나 이용하는 증축 프로젝트이다. 이곳에서의 터잡기는 건축가의 작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땅의 의지에 가깝다. 그 의지는 석축을 통해 표현되고 있었는데 그 길이와 높이와 각도를 통해 이미 스케일을 제시하고 있었고 계단은 이 땅에 존재하는 시간의 속도마저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배치에 있어서 멀쩡한 축대를 넘어뜨리는 따위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을 지경으로 구체적인 사인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암시들을 기정사실로서 인정하면서 이 작업의 성격은 공간적 대입이라는 물리적 성격이 아닌 시간이 개입된 재생이라는 추상적 의미를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는 민박집 주인이나 이용객을 고려하지 않거나 무관한 듯한 태도로 오인되기 쉽다. 건축이라는 용어가 실제적 의미와는 달리 마치 건축가에 의해서만 추상적으로 사용되는 듯한 혐의를 받을 만 하다는 것이다.

건축보다는 자연이 우선되야 한다거나, 인간은 곧 건축이라거나. 집주인의 요구가 건축가의 생각보다 더 중시되야 한다거나, 그러면 건축가는 아무 것도 아니냐 라거나, 그것도 때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기능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풍토에 따라서, 설계비에 따라서, 기분에 따라서 ,성질에 따라서 ,컨디션에 따라서 다르다거나, 산에서와 바다에서 또 다르거나, 시공자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라거나, 자기를 알아주는 건축주를 만났을 때와 무식하고 몰상식한 자본가를 만났을 때나, 중을 만났을 때나 목사를 만났을 때나……………..아니면 강도를 만났을 때 는 각각 다른 것 아니겠느냐가 아니다. 인간의 신체중에서 간이 더 중요한가 위가 더 중요한가는 좋은 질문이 아닐 것이다. 설혹 누가 묻더라도 답을 내기 위해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럼 두뇌하고 발톱 중 더 중요한 것은 어딜까. 발톱? 아니면 머리? 고양이 왈츠에서 고양이를 피아노로서 표현하고 있다. 발자국 소리가 하나도 비슷하지 않다고 해서 엉터리라거나 실제 고양이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아니 그런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이것은 순서를 매길 수 있는 문제이거나 방법론의 차이이거나, 프로세스 문제로서 다룬다면 충분한 답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구분하거나 기어이 분리하려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단 칼에 꿰는 고단위의 통합적 체계가 있지 않을까 오래 눈여겨보았지만 아직 못 봤다. 아니 이제는 찾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찾으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나는 지금 이 과정을 단축시키고 모형을 만들거나 도면을 그려야겠다는 못된 버릇을 또 다시 허락하고 있다. 글/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