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와이드 기고 인물기행 ‘건축가 유걸’, 2008

An Article ‘Youngman Yu-Geul’ Magazine Wide Architecture Report No.2., 2008

건축가 유걸

1963년 서울대 건축공학과 졸업한 후 무애건축연구소와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거쳐 1979년 유걸 건축연구소를 개설하여 현재 활동중이다. 이화여대 실내장식과, 숭실대 건축학과, 성균관대 건축학과 강사로 재직하였다. 정동교회(설계경기 당선), 모리슨 전화교환국, SAFCO/1971, 성 제임스 교회, MT, Bell 본사, James Morris Office, 올림픽 선수촌, 태국 신학교 마스터플랜, 이건창호 서울사무소, 전주대 마스터플랜, 요코하마 포트터미널(설계경기), 국립중앙박물관(국제설계경기), 연변기술대학 마스터플랜, 연변기술대학 도서관 등이 있다. 원서동 구씨댁 (1966년), 명륜동 강씨댁 (1968년), 정릉주택 (1968년), 레이크 우드 사무소 (1971년), 성 제임스 교회, 덴버 경찰서 (1974년), 성북동 서씨댁 (1986년), 모리슨 전화교환국 (1990년), 태국 신학교 (1990년, 태국 방콕), 평창동 이씨댁 (1990년), 이건 창호 사무소 (1992년), 한샘 기숙사 (1992년), 강변교회 (1992년).

청년 유걸

“아직 한참 하겠구나……..”

칠십을 앞둔 그에게 한창때란 말을 쓴다면 실례일까?

견고한 치열과 탄력 있는 얼굴, 면도된 살갗에 배인 검 붉은 색조. 조금은 분노 섞인 눈빛과 감출 줄 모르는 오만한 기운. 조각도로 깊게 도려낸 듯한 양 볼의 주름, 철사처럼 꼬부라진 성성한 수염발, 무사의 그것처럼 타고 흐르는 구레나룻. 상체를 움직이지 않는 잰 걸음의 보법과 직사로 꽂히는 쇳내 나는 목소리, 언제든 어디서든 자신을 세일하는 본능적 기질.

그리고

“저는요~”로 시작되는 씹는 듯한 통절한 언어의 마디마디들.

“나는 말예요~ 학생들이 나를 좀 더 실날하게 비평을 (까)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유머러스한 자신감.

”나는 말이죠~ 한국의 건축가들은 건축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현실로부터 유리되는 자가당착을 범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기성에 대한 노골적 거부감.

“평창동 서세옥씨집은 말이죠~ 제가 처음으로 감각이 아니라 생각에 의해 지은 집입니다. 나에겐 굉장히 의미 있는 집입니다.”라는 자기화 된 언어들,

“실용요? 나 그것에 대해 자신 있어요. 그건 머냐면요” 라고 시작되는 웃음 돋게 하는 만용들.

그런 말과 투를 들으면서 “나도 저럴 수 있을까?”라는 묘한 경외감이 생겼다. 그리고 동시에 거부감이 생겼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라는 질투심 같은 것 말이다. 이러한 기분은 그날 좌담회에 모인 사람들의 한결같은 칭송을 들으며 다시 고개를 든다. 살짝 약이 오른다.

”사실 선생님은 아웃사이더 아닙니까? “

흘긋 나를 처다본다. 잠시의 침묵과 그의 얼굴 붉어짐……….그리고 싱겁고도 모진 한마디의 고백

”맞습니다. 나는 아웃사이더입니다.“

이것이 그가 보여준 그날의 면면들이다. 지침도 물러섬도 없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도효에 앉아 상대를 향해 육박하기 직전의 스모선수의 뒷 꿈치 같았다. 한창때란 말보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만약 20여 년간의 미국 생활이 그에게 없었다면…………………..그래도 마찬가지였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공연한 가정은 그의 까칠한 언사 속에 돋아있는 기질과 모든 것을 유걸化 하려는 듯한 반골적 성정을 한국사회에 투영하면서이다.

덴버에서

“선생님께 미국은 무엇인가요?”

“저기 미국은 말예요~…………………”

하지만 그의 대답은 불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다시 묻지 않았다.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 한마디가 귀에 들어 왔다.

“미국에서 R.N.L.이라는 엔지니어 회사에 다녔는데 어느 경찰서인가를 설계하면서 건축주를 만나는데 자꾸 빠꾸가되는거예요. 그래서 내가 회사오너에게 말했어요. 당신이 오너니까 직접 하라고요. 난 좀 사무실을 쉬고 싶다고요. 그랬더니 그가 머라는 줄 알아요? 대번에 “굿 아이디어!” 그러는 거예요. 집에 가서 쉬라는 거지요, 나는 붙잡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하하하. 아~ 그리고서 사무실을 그만두고 집에서 노는데 얼마나 불안하던지,,,”

유걸은 이런 사람이다. 아무러한 이야기든 이렇게 특터놓고 말을 하므로 인해 자기로 향한 집중된 시선을 희발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이의 엘리트적 환상이 미국에서는 안 통했다.

“미국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공사비를 맞추는 일입니다. 약간만 오버해도 안되거든요. 나는 이것을 맞추는 것이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가 말하는 ‘몹시’ 와 ‘고통’에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가 ‘몹시 고통스러워했던’ 일이란 동시에 ‘몹시 기피하고픈 일‘에 해당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기피하거나 거부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몹시 고통스럽게 여기는 일‘이 바로 미국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가치의 수용여부는 바로 그의 생존과 직결되므로 좋고 말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수용한 미국적 가치(그걸 그는 실용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는 스스로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그것이 그를 밀어내고 들어왔다는 것이 옳다.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하길 좋아하는 아나키스트에게 이 강제는 고통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몹시 고통스러운 일’을 거부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서울에선

그가 김수근선생의 공간에 들어갔을 때(26세) 맡겨진 프로젝트는 제헌국회기념회관 이었다. 그 작업을 맡긴 김수근 선생은 별다른 말없이 작업이 재미있는지 여부만을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작업이 마무리되는 어느 날 진흙으로 빚은 모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건물은 자네가 사무실을 차린 후 하게, 난 이걸 팔 자신이 없네.”

이 유명한 일화는 김수근의 너그러운 측면과 아카데믹한 공간의 분위기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건축조형을 설계의 주제로 삼는다는 이유에서 공간을 선택했던 그에게 김수근 선생의 거절은 절망의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면 당시 한국의 설계사무실에서 가장 진보적인 곳인 공간에서의 절망은 그가 딛고 설 영토가 한국에서는 마땅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선택한 방법이 다시 유걸 답다. 그의 선택은 김수근 선생과의 대회에서 조형을 포함한 건축 전반을 제외시켰고 오직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주제에 관해서만 소통을 한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김수근은 그에게 선생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가 정한 방식은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설계작업을 위해서 꼭 필요했던 부분에 대해서만 공간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채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문을 닿아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해자를 건너 자신의 성채에 은신했다. 하지만 그 고립감이야 어쩌랴? 결국 한국엔 그가 설 항구적인 영토도, 또 훗날이나마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도(자신 스스로와 그것이 속한 환경모두)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의 미국이민은 이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가 한국과 미국에서 겪은 두 번의 경험이 절망이었다면 그 둘의 공통점은 조직에 대하여 반응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과신하며 자신의 방식만을 신용했고 합리라고 부르는 관용의 범위 또한 자신이 정했으며 이것을 한국과 미국에서 동일하게 적용했다. 그리고 동일하게 배척됐다. 말하자면 그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선천적 아웃사이더인 것이다. 그런 그가 실용(자신을 타인에게 적용시키는 순화된 방식의 제스츄어)라고 부르는 무기를 손에 쥔 것은 조직이 아니라 개인사업인 빌더 생활을 통해서이다.

“저는요~페인트칠이든 머든 다 잘할 자신이 있어요.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말이죠……벽돌 쌓는 거 그거 굉장히 재미나는 일이거든요…”

비로서 그는 자신이 온전한 주체가 된 빌더라는 직업을 통해 자신이 흥미로워 하는 일과 자신을 드러내는 대상을 일치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받아들인 실용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내면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반 의지적 가치가 아니라 자신(감각)을 타인에게 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자발적인 도구가 된 것이다. 얼핏 보면 그것은 비슷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경로는 매우 다르다. 말하자면 유걸은 실용이란 가치마저도 그다운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인 것이다.

다시 서울에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의 건축에서 많은 불편함을 느낀다. 보는 이의 의지마저 포박하려는 듯한 강한 이끌음과 노골적 호객에서 현기증이 생긴다. 특히 류인의 조각(혈흔이 묻어있는 듯한)을 연상시키는 그 핸드레일의 과도한 난무를 보며 그 노골적 현혹에 실소한다. 하지만 부럽다. 공간과 R.N.L.에서 드러냈던 원시성은 여전히 건재했고 여전히 과격했지만 그 결과는 지난날의 배척이 아닌 환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40년전 김수근이 팔지 못했던 그의 원시성이란 몸에 미국에서 얻은 실용이란 옷을 입혀 보편이란 이름으로 팔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언더가 아닌 주류의 아웃사이더가 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더구나 그것이 타인에게도 유효하게 적용되는 가치가 된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취한 실용은 그의 원시적 본성을 모던하게 만든 새로운 문명의 옷이다. 동시에 자신이 은거할 안락한 성채이기도 하다. 그는 그 둘 모두를 갖고 있다. 이제는 하나만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그가 즐겨 부르는 감각이란 영토와 그곳에 기록된 그의 사전을 뒤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욕망은 어린아이를 잉태시킬 만큼 건강하고 의욕적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한창때가 아니겠는가? 아니 그는 이제야 제대로 시작하고 있다.

이 글에서 사용된 단정적 언어들은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순전히 나의 짐작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에 대한 면책을 슬그머니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맘껏 쓰라는 유걸선생님께 감사를 표한다. 글/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