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기고, ‘드로잉에 대하여’, 월간 건축세계 No.0306, 2005

An Article, ‘About Drawing, Magazine ARCHWORLD No.0306, 2005

드로잉에 대하여

드로잉이란 개념을 구분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의 경우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따로 한 적도 없었지만 보통 도면을 작도할 때를 두고 “드로잉을 한다”고 했거나 대게는 설계과정에서 나오는 스케치 따위를 염두에 두고 해왔던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얼마전 한 화가와 만났는데 그가 공제 윤두서의 초상화를 제일의 드로잉으로 꼽는 것을 보고 “이게 전부는 아니었구나!”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렇다면 드로잉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나름대로 이렇게 한번 규정해본다.

“금을 긋는 언어(사고) 혹은 행위”

그림에 소질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나였기에 건축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건축가에게 스케치는 기본!”이라는 식의 말들은 나를 은근히 위축시켰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야말로 스케치를 잘한다는 선수를 만났었다. 그는 나를 약이라도 올리려는 심사처럼 검은색 싸인펜을 사용하여 (그것도 데생 연필을 잡듯 삐딱하게 그리고 가끔 고개는 갸우뚱거리며……….) 스케치를 하였는데 난 그만 그의 무심한 듯한 손놀림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때 그는 여러 종류의 건물들이 모여있는 복잡한 상황들을 몇 장의 투시도를 통하여 해부라도 하겠다는 듯 그려 댔는데 마치 45분 현상소에 있는 기계처럼 그림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어렵다던 둥근 타원의 선들도 그에게는 문제가 없는 듯하며 그림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소설가처럼 간단없이 탄생시키고 있었다. 그것도 수정 불가능한 A급 검정색의 싸인펜으로 말이다. 그런 그가 흡족한 듯 커다란 기지개를 필 무렵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한마디를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그릴 수 있나요?”

그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곧이어 신화 같은 한마디를 남긴다.

“니 키만큼 그리면 된다.”(어지간하면 후배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말자.)

설계사무실을 다니면서 조감도나 스케치를 할 기회가 있으면 은근히 기분 좋았었다.

바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설명하기도하고 보스가

지나가면 눈에 띄기 좋은 자리에 그림을 밀어 놓기도 했었고 사람들이 구경이라도 하면 나는 거만함은 그 정도를 더했다. 그리고 누구처럼 가끔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었다.

One day!

포천에 있는 레져 시설의 계획을 맡은 나는 신나게 디자인을 하였었다. 동그란 중정이 있는 호텔과 하늘을 찌르는 듯한 예각의 관리소는 물 속에 담았고 그 물은 선큰(SUNKEN)속에 만들어진 수영장으로 연결된다는 멋들어진 마스터플랜이었다. 그때 마침 보스가 옆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브리핑을 자청했다. 아! 그러나 보스의 눈은 자꾸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 아닌가? 그러더니 결국 눈가에 싸늘한 냉소가 흐르면서 한 마디 하신다.

“너에 생각 모두를 알겠다만……………………………. 그러나 좋아 보이지가 않는구나.”

그러더니 그는 작심한 듯 지우개를 움켜쥐고는 나의 스케치를 지워나가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사본이 따로 있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는 그저 트레싱에 그려진 원본의 그림을 다림질하듯 말끔히 지울 뿐이었다. 그예 지울 건 무언가? 맘에 안 든다면 될 것을 말이다. 야속했다.

이윽고 나의 보스는 파란색의 스테틀러 홀더를 안주머니에서 꺼내서는 지워진 종이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내게 한 수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종이 위의 허공에서 몇 번인가를 맴돌던 그의 손들은 어는 순간 수리가 쥐를 채듯 종이위로 돌진한다. 그의 선들은 이미 무엇을 작정하고 있는 듯 했다. 수없이 지우기를 반복하고 또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지만 이미 답안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 흔적을 추적하듯 그어 댔다. 검객이 칼을 휘두르는 듯 했다. 두툼한 트레싱지 위에 떨어진 흑연 가루들은 낭자한 선혈처럼 빚을 반사하고 있었다. 몇 번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숨소리를 고르던 그는 “다 이루었도다.”하시며 벌떡 일어나신다. 그러더니 나의 눈을 힐긋 처다 보고선 “잘 보았는냐?”하는 듯 도포자락 휘날리며 홀연히 자리를 떠나신다. 보스 없는 테이블 위엔 그가 읊조리던 “건축이란 말이야………”하던 언어들이 조각조각 놓여져 있었다. 화두였다.

내가 그나마 자부심을 가졌던 말쑥한 나의 선들은 하나의 Line 였고 그의 선은 하나의 의미였다. 나는 선을 그었지만 그는 생각을 쫓을 뿐이었다. 나는 선을 바라보았으나 그에겐 생각의 자국이거나 그림자에 불과한 듯 했다. 내가 저격수였다면 그는 B52였고 내가 면도날이었다면 그는 작두거나 청룡언월도였다.

난 그 즈음 선(Line)을 버리고 건축을 배우기로 작정을 했었다.

내가 어느 전시회를 가거나 드로잉의 선수라 할 수 있는 화가들을 만나서 그들과 선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민망한 과거 때문이다. 그렇듯 선을 의식하여 만들어진 선을 보면 그 불온한 의도가 악취처럼 직감되고 참지 못한 지경으로 이르르면 나의 보스가 내게 했던 것처럼 살충제를 도포 하듯 지우개 질을 해대고야 만다. 나쁜 선들을 아니라고 우기는걸 보면 정말 밥맛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약한 버릇은 뜻밖의 기쁨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그건 역시 좋은 선을 만났을 때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진 이와 만났을 때이다.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2000년을 맞아 공간지에서 건축가 100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며 스케치하나씩을 개재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건축가 유 걸의 요코하마 터미널의 스케치를 대하고는 그 마음을 느꼈고 그이를 찾은 적이 있었다. 누런 롤트레싱지에 목탄처럼 그어진 그의 선들은 그를 만나본 적 없지만 그 어느 것보다 그를 소상하게 기술하고 나는 믿기 때문이었다. 오래 묵은 종양이 터지는 듯한 통쾌한 필치는 그 한 장의 그림이 그리기 이전까지의 번민의 두께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고 그 실마리가 섬광처럼 스치는 순간 운명처럼 연필을 쥐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빠른 필치였다. 그 그림의 속도의 정체는 혈관 속에 흐르는 싸이클을 표현하기보다는 몸에서 터져나오는 에너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어지는 무심한 동작임이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 그이와의 대화는 통쾌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듯 선이란, 드로잉이란 그 사람을 잔인하게 반영한다 것이다.

선 잘 긋자. 선이 곧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무심한 그 선은 5년이나 십 년쯤 반드시 환생할 것이다. 그리고 5년이나 십 년 동안 마음속 어느 곳에선가 숙성되고 반응하며 그 몸을 지배할 것이다. 숙주처럼 말이다. 그러니 그 얼마나 무서운 노릇인가?

그렇다면 선을 통해 생각이 나오는가?

생각을 선이 반영하는 것인가?

참으로 재미있고 오묘한 이야기다. 하하하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드로잉의 아름다움은 결코 그 선이나 색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선과 색을 긋게 하며, 멈추게 하고, 휘 갈기게 하고, 끊게 하는 것을 오롯이 통제하는 그 무엇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영혼이다. 글/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