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와이드 기고 건축가 민규암 인물기행 ‘Q.M. Min’, 2008.

An Article ‘Q.M. Min’, Magazine Wide Architecture Report No.3., 2008.

 

민규암/ 토마건축 Q.M. Min/TOMA Achitects

민규암은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 건축대학원에서 설계전문 과정을 마쳤다. 첫 건축 작품 ‘한호재’로 건축문화대상, 건축가협회상, 동아시아 건축가협회 아카시아 건축상 등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현재 토마 건축사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건축활동과 더불어 단국대학교 겸임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건축사협회의 국제위원으로서 APEC 건축위원회 등 각종 국제건축회의의 한국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한호재, 첨성재, SS하우스, 세한가, 생각 속의 집 Ⅰ, Ⅱ 등이 있다. 

Q.M. Min

인사동과 탑골공원사이에 내가 다니는 단골 순댓국집이 하나 있다. 부슬부슬 비가 오거나 속이 허한 날이면 이 집의 누릿한 냄새가 떠오른다. 얼마 전 이 집을 다시 찾았다. 누런 돼지기름으로 찌든 천정과 미끈거리는 바닥, 삶은 돼지의 머리, 혓바닥 ,귀때기와 발가락들. 여전히 흥건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육천원짜리 술국을 시켜 밥 한공기를 덮석 말았다. 쫀득한 돼지비계가 어금니에서 꾸덕꾸덕 씹히고 붉게 풀어진 다대기향이 입안에 가득 고인다. 역시 최고였다.

“저기 손님.”

이집의 주인인 살짝곰보 아줌마였다.

“죄송한데 예….. 오늘 여서 찰~령이 있어서 예”

“찰령요?.”

“예에. 찰~령요. 우리 집이 고마 테레비에 나온다 아님니꺼. 그래서 오늘은 좀 일찍…..”

“와~ 근데 방송국에서 얼마나 준답니까?”

“30만언이라네 예(베시시 웃으며).”

한 방송국에서 이 순댓국집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촬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머니의 흐뭇한 표정을 보면서 그녀에게 지급된 30만원에 대하여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그 돈의 내역을 세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자신들 때문에 장사를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보상의 의미일 것이다. 거기다가 공간을 빌려준 아주머니에 대한 고마움도 있을 것이며 촬영 중에 사용될 전기세와 화장실의 수도세와 오물세도 조금씩 포함돼있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 끝에 그들이 치러야 할 값어치가 그런 물리적인 것 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이 집의 분위기를 빌린 값 말이다. 사실 그 분위기라는 것이 한 없이 꼬질 거리지만 그런 너절함을 일부러 만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이것이 드라마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라면 그 가치는 더 커진다. 그러므로 이 가치에 대한 값도 함께 매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그리고 30만원 속에 그 무형의 가치가 포함 된 것이라면 그 돈의 소유자는 아주머니일까? 혹은 아주머니에게 세를 내준 주인집 할아버지일까? 아니면 그 집을 인테리어 한 동네목수일까? (웬만하면 ‘외국은 이런데..’라고는 말하지 말자.)

 

저작권 

건축가들은 자신이 설계한 집을 두고 ‘내 작품’이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그것은 건축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담긴 말로서 자신의 설계도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므로 저작권자 또한 자신임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른 듯하다. 우선 대부분의 건축주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집은 나의 소유인 ‘우리 집’이지 ‘나의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저작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혹 그것이 저작물 일지라도 저작행위인 설계가 완료되면 그때부터는 저작권을 포함한 일체의 권리가 자신에게 넘어온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건축가들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 재밌는 사실은 ’내 작품‘이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저작권과 관련되서는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많은 건축가들이 “설계도의 저작권은 갑인 건축주에게 귀속된다.“라고 적힌 설계계약서에는 동의 한다는 것이다. 특히 관공서의 경우는 백발구십구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도 ’내 작품‘이라고 말을 하거나 자신을 ’작가‘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지닌 사람이 건축계에도 있다. 바로 건축가 민규암이다. 그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장하고 실천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피카소의 작품을 구입했더라도 그 그림을 이용해서 엽서나 출판물로 만들어 판매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림의 소유권과 저작권과 사용권과 출판권은 모두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옭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순댓국집처럼 그의 작품이 드라마의 배경으로 사용된다면 저작권자인 그는 자신의 저작물을 상업적 행위의 대상으로 삼는 방송사로부터 일정비용을 받을까? 그는 당연히 받는다. 그것도 많이. 심지어 건축주와의 계약을 하면서 여기에 대한 조항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런 경우가 생긴다면 그땐 어떨까? 가령 상업적인 목적으로 민규암이 설계한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을 한 후 건축가에게 사전에 동의를 받지 않거나 아뭇소리없이 내 뺏을 경우 말이다. 그건 허용이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재판이 걸릴지도 모른다.

때는 바야흐로 1999년도였다. 민규암은 한호제로 건축상을 수상한 후 서울시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는다. 월드컵을 앞두고 세계에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을 만한 화장실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말한다.

“정말 감격스러웠다. 서울시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업의 일부에 참여해서 한몫을 당당히 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니. 사실 그 설계비는 그때 느끼고 있던 막중한 사명감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것이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훌륭한 건물만 지어줄 수 있다면 본인의 사비를 털어서라도 해주고 싶었다…………………마지막 날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서울 시청에 도면을 납품하면서 느꼈던 새벽 공기는 얼마나 시원하던지. 납품 후에는 모든 것이 잘되리라 믿었다. “1)

그러나 이게 웬일일까? 발주처가 건물을 임의로 변경하여 시공을 한 것이다. 공무원과 상의했으나 별 소용이 없다.

“주변의 민원 때문에….”

결국 민규암은 저작권심의 조정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했으며 그들로부터 ‘철거 후 재시공’이라는 최종 결론을 얻었다. 일이 좀 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이것이 왠일인가? 서대문구청이 공사를 강행한 것이다. 국가로부터 저작권에 관한 기준을 위임받은 기관의 요구를 그 주체인 국가 스스로가 어긴 것이다. 민규암은 결국 서울 지방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그렇다면 그가 소송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경제적인 이득일까? 오기傲氣일까? 투기鬪氣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작권법상 건축저작물이 명백히 법조문에 들어가 있지만 건축저작물을 갖고서 하는 첫 사례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계속 그저 그렇게 체념하면서 건축가의 지위와 사회적인 역할정립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의 건축문화는 지금 이대로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3년간의 재판 끝에 판사는 건축가 민규암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건축분야에서 저작권에 대한 최초의 판결이라고 한다.

 

M.I.T.

그의 대학원 시절로 한번 가보자. 대학을 마친 그는 M.I.T.로 갔다.

“자넨 왜 M.I.T.를 지원했지?”

토마스채스틴교수Thomas chastain 교수였다.

“이곳이 높은 명성을 갖고 있는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문제가 많겠군. M.I.T.의 스튜디오가 어떤 건축가를 목표로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수업을 받고 있으니 말이야.”

한 마디로 말하면 잘못알고 찾아 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M.I.T. 출신인 아이엠 페이를 비롯하여 세계에서 유명한 대부분의 현대 건축가들이 모두 쓰레기 같은 건물을 만들어 내는 사기꾼들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아이엠 페이가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면 과연 누가 쓰레기가 아닐까? 그가 지목한 쓰레기가 아닌 건축가는 카를로 스칼파, 루돌프 엠 쉰들러, 알바알토, 군테 베니쉬, 알도 반 아이크, 헤르만 헤르쯔버거등이었다. 물론 너무나 훌륭한 선정이다. 누가 이순신 장군과 바하를 나무랄 것이며 단테의 신곡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누가 감히 나쁜 책이라고 말을 하겠는가?

학교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건너편의 하바드대학은 화려한 스타건축가들이 가르치고 있었지만 M.I.T.는 프로페써가 스튜디오들를 맡았다. 그 중에는 가방 속에 대패와 망치를 넣고 다니는 목수도 있었다. 복도에선 이집트의 민중건축가인 하산파티가 전시하고 있었고 네델란드 의헤르만 헤르쯔버거등 구조주의자2)들이거나 찰스꼬레아등이 드나들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M.I.T.는 미국에서도 가장 먼저 건축과를 만들었던 진보적인 대학이었기 때문이다.그런 대학이 피터아이젠만, 쿱 힘멜브라우,프랭크게리등 그 당시를 풍미하던 건축가가 아닌 유럽의 건축가들이나 제3세대의 건축리더 건축가들과 소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M.I.T.가 추구하는 진보의 의미는 다른 듯 했다. 그들은 최신의 트랜드를 만들거나 문명에 기초한 물질적 테크널로지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에 대한 근원적인 질서와 창조의 원리에 찾는데 가치를 두고 있었다. M.I.T.의 이러한 경향은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M..I.T의 건축대학장이 중국 건축가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대표대학 중의 하나인 M..I.T의 건축대학장이 미국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M..I.T가 건축가의 현재적 모습보다는 그들의 국가나 도시 혹은 그들이 생산하고 있는 이슈에 주목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M.I.T.분위기는 민규암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듯하다. 특히 Thomas chastain 교수는 ‘평생을 걸쳐서 생각해야할 대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바로 ‘싸부師父’를 만난 것이다.

 

시멘트 블럭 

건축가로서의 그의 데뷔작은 한호재라는 주택이었다. 나에게 인상 깊었던 점은 건물의 배치방식이었다. 한 채로 구성된 보통의 주택들과는 다르게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서로는 마치 열차처럼 연결되어 급하게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듯 기운차게 모여 있었다. 주위를 흐르는 개울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 독자적인 배치였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민규암이 건물의 배경과 조건조차도 스스로 개척하는 건축가라는 인상을 느꼈다.

눈에 띠는 또 하나는 시멘트블럭의 출현이다. 엄밀히 말하면 재료 그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그의 솜씨라고 하는 게 옳겠다. 그때까지의 시멘트 블록이란 무엇이었던가? 그저 돼지 축사나 담벼락등을 구성하던 ‘쎄멘 뽀로꾸’였을 뿐이었다. 개인 별장에다가 새마을 운동의 대명사인 ‘쎄멘 보로꾸’를 사용한 것이다.

“아니 우리 집에 쎄멘 보로꾸를 쓰겠다고요?”

“예.”

그런데도 그의 손이 닿자 성질이 바뀌어버렸다. 여전히 거칠었지만 엄격함이 생겼고 싸구려였지만 규범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집은 ‘한국건축문화대상’‘아카시아’등 국내외의 유명 건축상을 휩쓸었다. 마치 공리를 발굴한 장예모처럼 ‘쎄멘 보로꾸’는 민규암의 페르쏘나가 되어 화려한 부활했다. 민규암은 그렇게 건축계에 등장했다. 그 이후 그는 이 재료는 십년이 넘도록 줄곧 애용된다. 민박집이건 주택이건 사무실이건 어디든 쓰였다. 물론 축조방식은 늘 달랐다. 세워쌓고 눕혀쌓고 덮어쌓고 젖혀쌓고 모아쌓고 얹혀쌓고 그것을 다시 섞어서 쌓았다. 마치 하나의 문장도 그 최소의 단위는 ‘ㄱㄴㄷㄹ’ 이거나 ‘ABCD’ 알파벳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 자신의 모습을 모두 노출시키면서 말이다. 용처도 점점 변했다. 벽체에서 계단으로 다시 바닥으로 이동했고 의장에서 구조로 실용에서 상징으로 무한히 진화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실험을 가지고 그 오랜 시간을 설명하기엔 무언가 모자란다. 과연 한호제에서 그것을 사용한 이유였던 ‘값쌈’하나로 10년이라는 긴 시간 사용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시멘트블록이 값비싼 재료였다면 그는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값쌈’의 이유로는 수많이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값싼 건축재료들이 그의 선택으로부터 제외된 점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왜일까?

 

Q.M.MIN is….  

민규암은 한 아파트에서 삼십 년째를 살고 있다.

민규암은 한 장소에서 10년째 사무실을 한다.

민규암은 한 직장에서 7년 동안 단 한 번만 직장생활을 했다.

민규암은 한 재료를 십 년째 썼으며 독하게 맘먹고 바꾸려다가 다시 쓰고 만다.

민규암은 한 벌이 아닌 다섯 벌의 같은 옷을 번갈아 입는다.

민규암은 한 번도 현상공모에 응하지 않았다.

민규암은 한 번도 가假설계를 한 적이 없으며 계약 후 가家설계한다.

민규암은 한 번도 건축사협회를 떠난 적이 없다.

민규암은 한 가지 프로젝트만 설계한다.

민규암은 한 번 재판하면 끝까지 간다.

이러한 나열을 한 단어로 대신한다면 보수保守가 아닐까? 젊은 보수 말이다.

보수란 무엇일까? 내 생각에 보수란 참나무로 만든 아주 두툼하고 묵직한 쌍여닫이 문이다. 그것을 열려면 가로로 채워진 빗장을 풀어야 하며 늙은 집사를 불러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설득해야한다. 그것을 다시 집 주인에게 고하며 그리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문이 열린다.

“삐-이-거-어-더-억”

이때 빗장위에 얹혀 있던 두터운 먼지들이 소스라치듯 빚을 타고 산란하다. 이 처럼 보수란 가벼이 열리지 않는 문과도 같이 한번 내려진 정의를 쉽사리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미 내려진 정의일지라도 그것을 안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보수의 정의며 민규암이 지닌 순한 보수성다.

그렇다면 민규암이 수행을 했고 지금도 진행 중인 재판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어렵사리 내려진 정의를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확인하려는 행위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내린 정의를 타인에게 입증하려는 시도이며. 자신이 내린 정의를 안 바꾸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글/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