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와이드 기고 건축가 황두진 인물기행 ‘황의 전쟁’, 2008 창간준비호

An Article, ‘Hwang’s Battle’, Magazine Wide Architecture Report, 2008

건축가 황두진

196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어학과 역사, 물리학 등에 관심이 많았으나, 창조하는 일에 매력을 느껴 서울대 건축과에 진학했다. 대학원 재학 중인 1986년 2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했고, 약 1년에 걸쳐 유럽 여행기를 <월간 건축과 환경>에 연재했다. 군복무 후 서울건축에 입사했다가 이듬해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예일대로 유학을 떠났다. 건축석사를 마친 1993년 재미 건축가인 김태수의 사무실에 입사하여 7년간 그 문하에서 일했다. 1997년 김태수의 서울 사무실인 TSKP의 소장으로 부임하였고, 이후 2000년 6월 사무실을 개업하여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건축교육 및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의 겸임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서울대 건축 디자인 스튜디오를 가르치면서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건축 및 사회적 이슈에 대해 글을 쓴다. 시간이 날 때 법률 소설을 읽거나, 서울의 역사적 장소를 찾아다니거나, 혹은 마당을 가꾼다.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에서 발췌.

 

황의 전쟁

첫번째 만남-디바이더 황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월드컵이 열리던 즈음인 것 같다. 내가 운영하는 사무실에 건축가 황두진을 추종하는 한 보조원이 있었다.

“소장님. 황두진씨라는 분 아세요?”

“몰라.”

“그 분의 홈페이지 대따 유명합니다. 거길 봤더니 수원화성 투어를 함께 할 사람을 찾더군요.

수원화성,,, 꾸부정한 언덕을 따라 운율처럼 흐르는 성곽과 쉼표같은 성채들. 이틑날 나는 그곳으로 갔다.

그날 황두진은 까만 색의 엘란을 타고 등장했다. 정글에서 쓸법한 구불구굴한 챙이 달린 모자와 캘빈 클라인의 까만 색안경을 썼던 그는 조금 거만했다. 줄곧 도회에서 자란 사람이라 표나게 결례를 하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숙이는 법도 없었다. 그런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초면인 우린 어지간히 어색했던 것 같다. 그 어색함이란 사람에 대한 부침이 심한 나의 습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사람을 밀어내는 듯한 혹은 사람을 수월이 받아들이지 않는 의식적인 암시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언어 때문이었으리라. 수류방화정이란 분방한 형태의 누각을 지날 때 였다.

“저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좀 까부는 사람인 모양인데요.지붕 모양하며…..안 그래요?”

“에~~~~~~저 건축물은 경기대학교 김동욱교수와 화성의궤에 의하면 There is 약용-정 앤 正組….에또 네…………..좔좔좔~~~”

그렇듯 나의 그것은 즉흥적이었지만 황두진의 그것은 늘 정갈했으며 수원화성에 대한 많은 공부가 있음직 했다. 반면 나의 관심은 화성언저리의 허름한 두부조림 집이나 돼지머리 눌린 재래시장에 있었다. 그러니 그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없었던 것이다. 투어를 마친 그는 맹꽁이차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실 통의동에 구입하고 싶은 조그만 주택이 하나 있는데 계약이 가까스로 되려다가 캔슬이 되어서 마음이 좀 무겁습니다. 오늘 차로 어느 곳까지 뫼시고 싶지만 마음이 무거워서…..” 휭!

며칠 후 결국 그는 수원화성에 대한 글을 잡지사에 기고했다. 황두진은 그랬다. 얼마 전에도 체중을 줄인다며 서울 성곽을 한 바퀴 산보하더니 슬그머니 책을 하나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가 하면 어느 때는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군인처럼도 보인다. 특히 현장에서의 그는 사막의 롬멜이거나 스탈린 그라드의 친위대장교와도 같다. 이 가정이 맞는다면 동반하는 그의 개화기여성스타일의 보조사는 부관이며 현장 소장은 식민지 출신의 특무상사일 것이다. 그러니 미천한 상사의 반역을 롬멜이 용서하겠는가?

두 번째쯤 만남_ 후까시 황

그런 그가(툭하면 글을 짓고 걸핏하면 책을 만들고 특무상사의 반란을 화염방사기로 진압하는) 통의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우린 다시 만났다. 그곳은 어느 해군장군이 살았던 집으로 그 동네에서 가장 큼직했다. 마당의 포석정같이 생긴 연못에는 살찐 잉어들이 가득했으며 변소도 매 층마다 따로 있었고, 잘 다듬어진 향나무와 여러 해를 묶은 굵은 대궁의 모란과 그곳에 핀 사발만한 자줏빛 꽃들이 있었다.그리고 2층에는 한 군인이 지휘봉을 말아 쥐고 자신의 뜰을 내려다보고 있을법한 큼직한 베란다도 있었다.

거기에 비하며 우리가 놀던 친구의 집은 째끔했다. 이층이라곤 했지만 핼쑥한 얼굴처럼 모졌고 마당이래야 잔디는 어림없었다. 마당엔 그저 맨들맨들한 쎄멘(cement)으로 발라져 있었고 담장 모퉁이엔 당나귀의 정강이처럼 구부러진 단풍나무가 이파리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서 나와 친구들은 월드컵 경기 같은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놀길 좋아했었다. 그러던 여름 날 황두진이 두툼한 배를 앞세워 이사를 왔다. 좁은 통의동 골목을 매운 트럭에는 처음 본 하프시코드라는 악기와 내 책상의 두 배는 됨직한 도면함과 붉은 공단보자기에 쌓여진 조선식 활과 잉글리쉬(ENGLISH)의 원서로 가득했다. 그날부터 통의동의 생태계는 빠르게 변해갔다. 우선 나와 친구들은 말수가 적어져 갔다. 벽에 결려있던 오십 평짜리 고추장 박물관도 그의 큼직한 모형과 비교되면서 빚을 잃어 갔다. 그는 언제든 놀러 왔지만 우린 예약 후 방문했다. 체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희한한 화제를 꺼냄으로써 아무 소리 못하게 하는 비범한 재주도 있었다 (이건 좀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됨).

“제가 요 옆에 출판사를 설계하여 공사 중인데 굴토 공사를 하다 보니 조선시대 중기에서 후기로 살짝 넘어가는 시기라고 추정되는 그릇의 파편들이 여러 곳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그 일부는 한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은…..좔좔좔~~·”

이쯤 되면 그가 설계하는 사람인지 고고학자인지를 헷갈리기 시작한다. 땅을 파는 현장에 나가서도 그곳에서 출토되는 것들을 살피기는커녕 어수룩한 저녁의 고추장에 버무린 돼지고기와 향긋한 소주를 상상했던 나의 건축적 태도는 너무나 상습적이었다.. 그 뿐인가? 이사 올 동네를 이사도 오기 전에 간첩마냥 죄다 조사하고 동네의 내력과 신화와 전설과 소문과 역사를 따로따로 분간했고 그것을 다시 색깔로 구분하여 재구성했으며 다시 조합하여 시기별로, 테마별로, 구조별로, 규모별로 보관했다. 그런가하면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또 다른 별동부대였다. 그들은 줄자와 사진기로 온 동네를 유린했고 집 주인의 허락도 없이 가(家)설계를 해댔다. 그 모든 것을 이루었을 때 그는 입성했다.

황두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래 놓고 ‘동네건축가’라는 어수룩한 이미지의 타이틀을 자꾸 말한다. 믿어서는 안될 말이다.

세 번째쯤의 만남_똥뱃장 황두진

경기대학교 건축전시회가 종로 어디선가 있었다. 여섯 일곱 팀이 참여한 전시공간에서 였다. 선생과 패널들의 촉구와 학생들의 지친 호흡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곳은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들이 벽과 천장에서 만장처럼 나부꼈고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도무지 불가해한 도면과 아무도 몰라도 아무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는 언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허용되는 게토였다. 거기서 만난 황두진은 여전히 거만했다. 걸음걸이도 연못 속의 잉어마냥 느릿느릿 걸었고 조급하게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다. 그런 선생의 방자함에 비해 스튜디오의 학생들은 추레했다. 한 학생에게 묻는다.

“저기~~~학생 이것은 어떤 작품인가요?”

“네…이건 상추나 열무 등을 수경재배하는 장치가 있는 주택건물입니다.”

“머시라. 수경재배?”

그랬다. 화려함으로 가득했던 전시장에서 상추와 열무를 말하는 희귀한 종(種)들. 그들에 대한 반가움은 ‘캄(CALM)한 착지감’이거나 소란스러움의 반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선생을 옆에 두고 있었다. 얼마나 다행이고 또 드문 일인가? 난 속으로 선생 참 잘 만났다 싶었다. 그런 한편 측은했다. 언어란 자고로 마음에서 생성되어 입으로 빠져나가 그것이 스스로의 귀로 들리면서 소리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소리는 또 다른 사고를 촉진시켜 새로운 언어로 화(化)됨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기를 실컷 씹고도 정작 삼키지 못하는 아이처럼 마음 속의 생각을 언어로 만들지는 못했다.

오랜만의 만남_여전한 황

얼마 전 우린 2~3년의 터울을 두고 그가 설계한 가회헌에서 잡지사에서 주관하는 좌담회를 통해 다시 만났다.

어느덧 우린 40대 중반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도 나처럼 나이가 들었을까……말투는 바뀌었을까…..배는 좀 꺼졌을까……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무렵 저만치서 그가 들어왔다. 여전히 얼굴은 탱탱했고 잘생긴 코와 부처 같은 꼬리를 지닌 입술과 그 사이에 그려진 유쾌한 수염과 부풀어 오른 요염한 배……… 모두 여전했다. 빙그레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자켓 속에 받쳐입은 블루칼라의 폴로 티셔츠는 실로 오래된(족히 7년 숙성) 옷이었기 때문이다. 바지는 또 어떠한가? 누르스름한 미군 하복바지 같은 그것이야말로 황두진 패션의 고전이자 전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를 만난 열 번 남짓에서 그의 아내인 고현주씨의 합프시코드 연주회를 제외하곤 줄곧 그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그때도 실밥이 터진 그 종류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쯤되면 도무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바지가 이것 밖에 없어요?”

“똑 같은 게 여러 벌이라….”

“Why?”

“Why not?”

옷뿐이랴. 양보 없는 공세적 어법과 청룡언월도 대신 굳이 표창을 던지는 오만함, 놀라운 종류의 화제들, 달라붙는 각주와 미주들, 배격된 구어체들. 라틴어를 사용학고 픈 그의 눈빚들…….. 그는 그렇게 여전했다.

“이 건물의 평면은 135도로 기울어진 한옥입니다. 이런 각도를 가진 건물이 있는가 보려고 여러 날을 직원들과 서적을 뒤져봤고 이상해 교수님에게 그걸 여쭈어봤더니 그분 말씀은 이조 중엽 이전까지 한옥은……..그리고 이 건물이 짓기 전까지 여러 차례의 심의를 받았는데 앞에 있는 건물들을 따로따로 찍어 연결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했더니 효과가 있더군요. 그리고 심의 규정을 살펴보면 한옥이 있던 장소에는 다시 한옥을 지어야 한다는 그 규정들에 대한 불합리성이 있는데 이것에 대하여 가까운 누군가에게 물었더니 헌법소원을 통해 승소의 가능성이 있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한 개인 건축가가 할 일인가 말이죠……”

맞는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것은 건축가가 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한옥의 역사부터 컴퓨터 툴, 설계도에 쎄콤 도면이 포함된 이유, 한옥에 대한 주저 없는 정의, 그리고 헌법 소원까지. 우리는 이미 뱃멀미 앓은 사람마냥 눈이 풀려갔고 예전 나의 친구들처럼 말수를 잃어 갔다. 전투로 치면 참호전이거나 공성전이었던 그날 우리는 고국의 그리워하는 소서행장의 마지막 병사들처럼 희멀건 눈이 되어 갔다.

“쥔 아저씨! 리필커피 한 주전자 더!주!셔!요!”

그의 뻔함들

소설가 김훈과 관련하여 ‘칼의 노래’든 ‘현의 노래’ ‘자전거 여행’ 이든 사실은 모두가 빤하다는 어느 대담을 들은 적이 있다.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틀린말을 하지 않아. 그러나 내게는 도움이 않돼. 나는 나의 과오마저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해.”

김훈이 무엇을 쓰든 결국 뻔하다는 그 대담자의 지적은 틀리지는 않지만 핵심은 없는 비판이라고 생각 했다.왜냐하면 일정한 관점이 필요한 작가에게 ‘뻔함’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은 고추더러 매운맛을 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말하자면 김훈의 그 뻔함은 보태지거나 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령이란 것이다.

마찬가지로 황두진의 건축도 그렇다. 금호미술관, 열린 책들 사옥, 도서출판 해냄, 그리고 가회헌은 김훈의 그것과 같다. 그가 주택을 하건, 병원을 하건, 금은방의 케이스를 짜건, 결과는 늘 뻔하다는 것이다. 어디에나 버릇처럼 나무로된 루바를 두르고, 변소의 문짝에도 기어이 무늬목을 붙이고, 천장에 몰딩을 덧대는 것을 진정 싫어하고, 기필코 비둘기색의 창틀을 끼우고 마는 브르쥬아적 결벽들이 그렇다. 심지어 유리조차도 그의 손만 닿으면 광택이 바뀔 지경이다. 건물 전체의 인상은 또 어떠한가? 뚱~허니 배를 내밀고 있는듯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듯한, 자기 외엔 시큰둥한 듯 한 그 인상들 말이다. 나는 그런 뻔함들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노래의 곡조들이 아니 그걸 소리 나게 하는 그의 목청과 몸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뻔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뻔하지 않음들.

그런데 근래지었다는 가회헌은 좀 달랐다. 여전히 두툼해보였지만 실제적인 축성술은 예전과 왠지 달랐다. 왜 그런 혐의를 지울 수 없는 것일까? 우선 바깥을 좀 둘러보자. 이 집의 주변은 사방의 집들이 높이와 크기와 양식이 죄 다르고 접하는 길마다 넓이와 속도가 달랐다. 땅의 높낮이도 모두 다르다. 만약 이 대지를 느린 셔터의 속도로 하늘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전면의 도로는 노출과다이고 후면은 부족이며 그 편차는 족히 곱절을 넘을 것이다. 말하자면 적정노출을 찾을 수 없는 괴팍스런 부지이다. 이런 다양한 조건들이 회오리처럼 대지를 감싸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 처음 선 그날 황두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가 감지한 회오리의 정체들은 포식자를 입맛 다시게 하는 싱싱한 살점들이었을까? 혹은 ‘학(學)’을 등장 시킬 절호의 조건들이었을까?

황두진은 이곳에서 그 둘을 모두 거머쥐려 했다. 하나의 대지에 나무로 만든 기와집과 서양식의 레스토랑과 포도주를 저장하는 박공의 건물과 그것들을 공급하는 공장이 지하에 있다. 기와집은 얹혀 있었고 창고는 놓여 있었으며 양옥은 붙어 있었으며 공장은 묻혀 있었다. 하지만 난 이런 모양새를 복잡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 집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개별성은 자랑처럼 말하는 135도의 한옥처럼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회헌에서 보여준 황두진의 뻔하지 않음은 ‘불가피한 선택’ 부분과 작위라고 부르는 ‘의식적 선택’부분의 혼용에 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쥔 네 개의 패(기와집.와인창고,레스토랑.그리고 지하공장)는 분석의 대상인 동시에 구축이라고 부르는 ‘술(術)’의 재료였으며, 타자화된 오브젝트로도 사용됐다. 그도 저도 애매할 땐 ‘습(習)’의 영역으로 넘겼다. 그리고 그 넷 사이의 공허함은 지우개로 슬쩍 흐리거나 길다랗게 늘려 현혹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양옥과 기와집 사이의 나무(탐욕스런)이며 커튼처럼 둘러 처진 유리집이다. 좀 더 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 넷을 잘근잘근 씹어서 소화시킨 것이 아니라 뼈다귀만 추린 후 슬그머니 밀어 놓은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실 그 넷은 자체만으로도 그 얼마나 기막힌가? 한옥의 자분자분한 디테일과 광택으로 빚 나는 통유리의 세련됨과 양철지붕과 스터코 그리고 서로의 은근함 섞임들…….이 화려한 뷔폐는 그 개별성만으로도 이미 흐뭇한 만찬이다. 결국 이 배부름은 황두진의 진화에 대한 욕구를 새삼스럽고도 고통스런 선택의 영역으로 밀어냈다.

그런 결과였을까? 망루인 2층은 화려했다. 가로로 길 게 그어진 관음의 창문. 시나고구의 벽과 커다란 유리창, 카키색의 천정과 보라색의 그림과 오크나무 원색의 뒤섞임, 전돌의 퉁명스런 줄눈, 동선으로 갈라진 후로아. 요사스런 전등. 레스토랑과 미술관의 혼재………. 코너 웍에 절륜한 디바이더 황이 갑자기 왜 이런 난조를 보일까? 다채로움에 대한 오역인가? 스스로의 뻔함이 지루해진 걸까? 아니면 무거운 이념들로부터 자유하고 싶은 걸까? 그 어떤 선택이든지 분명한 것은 이전의 뻔함이 타인의 평가에 의한것이라면 가회헌에서의 그것은 스스로의 선택처럼 보인다. 이 가정이 맞다면 그는 이제 투명한 유리병에 그의 뻔함의 어휘들을 담아 놓고 용처에 따라 핀셋으로 이곳 저곳에 이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이 집이 사람에게 비추어질 현상과 노출될 현상과 파악될 현상과 느껴질 현상과 그리고 이것이 이루는 최후의 결정적 기억이 반드시 진실에 의해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심리적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뻔하지 않다.

그리고 애매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회헌의 성패는 그의 의지에 의해 결정될 부분이 따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채점의 기준은 그가 마음 속에서 지향한 만점의 수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평소 황두진의 스타일로 본다면 그는 건축적 성취에 모든 것을 걸기 보단 그 기준을 상대적 좌표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 둘을 일치시키는 부류의 건축가와는 좀 다르다. 한마디로 건축을 죽기 살기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건축에 대한 소홀함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한 왕성한 관심에 의한 것이다. 그것이 건축을 중심에 둔 다양한 모색인지 아니면 별 다른 편애 없이 등분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건축을 이루는 것을 절대적 목표로 삼는 건축가라기 보단 건축을 통해 자신을 이루려는 유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이룬 건축은 커다란 이슈를 동반하기 보단 오히려 열무나 상추스러웠다. 내가 좋아한 뻔함은 그런 천진스런 뱃심이었다. 하지만 이 보편적 룰을 매번 적용한 것이 그의 불운이 아닌가 싶다. 가회헌은 그가 소유한 논리적 결구 속에 종속시키기에는 너무 험준한 전장이었다.

가회헌의 부지에 처음 선 날 황두진이 정한 건축적 태도는 무엇일까? 치열한 전투를 예감한 그의 선택은 통쾌한 승리보다는 실패하지 않는 전쟁의 시나리오를 짠 듯하다. 왜냐하면 치열한 전투라고 치기에 그의 전투보고서는 너무나 짜임새 있기 때문이다.(이건 그의 비겁이 아니라 논리적 형식을 추구하는 지독한 항성이다) 또 하나는 의심은 그의 멀쩡한 몸에 비해 전리품이 너무 풍성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밉살스런 승리인가? 그러므로 그의 실패하지 않는 전쟁은 그의 절륜한 지휘덕분보다는 갑옷의 우수성에 믿음이 더 간다. 하지만 여기서 갑옷을 벗어야 옳았다. 반자이 도쯔께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헌신만이 새로운 지평에 대한 첫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며 새로운 지적 영토를 얻기 위해선 안전이라는 결박을 스스로 풀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더라면 뼈다귀로 보이는 넷 중 하나는 죽고 하나쯤은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더욱 좋았다면 스스로 그것들의 기승을 다스려야 했다. 그것이 바로 오만함으로 온 몸을 두른 그의 근거여야 옳았다. 그렇지만 그는 얻음보다 잃지 않음에 전력을 다하거나 모두 죽이고 그 넷만 살린 후 그곳에 분과 기름을 바른 게 아닌가 의심하는 거다. 그래서 과도하게 빛난 것이고, 발광하는 빛들은 서로를 잡아먹듯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 이러한 충돌은 전례가 없으므로 독해되기 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며 공연히 벙긋거리거나 허허롭게 웃는 것이다.

건축가 황두진은 하잘 것 없는 사기 그릇 쪼가리에서도 한 권의 책을 생산했던 세련된 인식을 지닌 사람이다. 특무상사의 순진한 소요에도 미사일을 발사하는 그가 가회헌의 소란함에는 왜 이리 관대했을까? 루이스 아이칸을 사모하는 그가 왜 나무를 벽지처럼 바르고 있을까? 온통’학(學)’으로 가득 찬 그가 왜 ‘술(術)’에 매달릴까? 그게 애석하다. 허리에 두른 표창으로만도 이미 충분하거늘 왜 자꾸 갑옷을 껴입으려는가 말이다. 그게 답답하다.

당신의 카르타고는 어디입니까?

후기

내가 설정한 틀은 이야기의 관점을 형성하기 위한 서너 개의 지점들이며 내가 발견한 일부일 뿐이다. 이곳에서는 어두운 밤 홀로 피아노를 치는 황두진을 말하지 않은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그것 말고도 얼마나 많으랴? 그래서 활자의 한정성이 두렵고 위험하다. 가장 명백한 사실은 건축가 황두진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다. (2008년도 격월간 와이드 창간준비호) 글/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