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강태남 기자, 월간 C3 Korea 0105 No. 201., 2001

Critique, Kang-Taenam, C3 Korea 0105 No.201, 2001

제주충신교회

강태남 (건축과환경 기자)

좋은 취락조건을 갖춘 땅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살아왔고, 대부분의 도시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조건들을 멀리까지 다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 흐르는 물이 없고, 곡식이 뿌리내릴 땅덩이가 없으며, 난방을 위한 땔감이 나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것은 별반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산업화와 함께 해온 도시의 발달은 이제 비인간적인 수준에까지 다다랐다고 보여진다. 물 없는 사막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이 현재의 인간이다.

바둑판처럼 가로를 만들고 택지를 정리한 땅은 어찌 보면 사막과 다를 바 없다. 그런 도시는 어쩌면 인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곳일 지도 모른다. 여하튼 대부분의 도시는 그런 식으로 팽창해 가고 있으며, 충신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제주시 연동 역시 그런 신시가지이다. 자로 잰 듯이 땅을 나누고 이만큼은 주택부지, 이만큼은 상업부지, 그리고 학교용지, 종교용지 등등으로 나뉘고 금새 사람들이 들어차는 것이 현재의 우리 도시들이다.

충신교회는 신시가지의 유치원 용지에 들어선 교회다. 주변은 다가구주택들로 둘러싸여 있고 교회는 그 사이에 마련된 공원의 한쪽 귀퉁이에 세워졌다. 들어선 모양새를 보건대, 공원을 끼고 있어 매우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재관 씨는 유치원 용지이기 때문에 교회시설이 용도의 절반을 차지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지키며 주변 주택지에 어울리는 스케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 스케일의 문제를 대외적인 교회의 이미지와 사회적인 발언으로 규정하고, 결국 그는 이를 형식과 이미지에 대한 문제로 전환하였다. 십자가 없이 건물 자체로서 교회임을 인식하기 힘든 충신교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1층에 유치원, 2층에 교회 예배당을 가진 이 건물은 예의 김재관 씨의 설계작들에서 보여지는 일반적인 해법을 가지고 있다. 노출콘크리트와 시멘트 몰탈 뿜칠에서 느껴지는 투박하고 거친 맛은 그의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본당의 천장을 한 바퀴 휘돌은 천창 역시 익숙한 그의 수법이며 빛을 통해 채광 문제와 신성의 구현을 해결하고 있다. 본당 벽면을 따라 떨어지는 빛은 시멘트 몰탈의 거친 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런 단순하고 익숙한 재료의 사용과 단일한 매스, 거기에 덧입혀진 무채색은 그 형태에서 교회임을 암시하지 않으려 한 그의 의도가 충분히 실현된 결과이다.

인간이 사는 도시가 어떻게 변해가든 사람들은 교회를 필요로 하고 그 교회가 존재하는 방법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물처럼, 나무처럼 자연스러우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회일 것이다. 메마른 도시에 자리잡은 교회 같지 않은 무채색의 교회, 충신교회는 그렇게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Review

강 태 남 (건축과환경 기자)

김재관 씨가 설계한 건물의 입면도에는 대지선이 없다. 단일한 매스에서 풍겨 나오는 강한 질감을 가진 그의 건물을 설명하는 입면도에 대지선이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단단한 대지 위에 서있어야 하는 육중한 건물이 허공에 붕 뜬 느낌이랄까, 어울리지 않고 허전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분명하고 간결하다. 그의 말인 즉슨,

“풍경화가 아니기 때문에, 건물은 대지와 접하는 부분에서만 선이 발생한다.”

그 역시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가 굳건한 건축가인 것이다.

그의 건물은 둔탁하고 거칠다. 일반적인 노출콘크리트로만 마감이 됐어도 매스의 느낌은 단정했을 테지만, 그는 벽면에 시멘트를 덧붙이거나, 거푸집의 틈새로 스며 나온 거스러기를 일부러 의도한다. 강정교회의 벽면도 그러했고, 이번 제주 충신교회와 부천 성만교회가 그렇다. 콘크리트가 진중한 재료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물성은 그래서 무게가 있다. 재료 자체의 무게뿐만이 아닌 한번 굳어지면 어쩌지 못하는 특성상, 각 작업의 단계에 진지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콘크리트의 벽면에 시멘트 몰탈 뿜칠을 하여 재료의 질감을 더욱 강조한다. 또한 거친 시멘트 뿜칠 자국은 빛에 따라 표정을 바꾼다. 빛을 이용하여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듯이 빛을 이용하여 벽체에 표정을 담아내는 것이다. 충신교회의 본당 천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은 벽면의 몰탈을 따라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성만교회에서도 외벽면의 거스러기는 빛에 의해 긴 그림자를 남긴다. 그 느낌은 두 벽면 사이공간으로 빛이 떨어질 때 더욱 강조된다. 이런 가장 일반적인 재료에의 천착을 통해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질감의 충실한 구현이기도 하지만, 근대건축에 대한 향수가 그의 작업을 그렇게 이끄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는 바뀌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그는 골수 모더니스트인지 모른다. 물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건축이 순수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의 가슴 한구석에 있다. ‘정신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만교회의 벽체를 사랑한다’는 그의 고백은 순수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재관 씨는 건축물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교회 건축 역시 신앙과는 유리된 작업이다. 형태로부터 유추가 가능한 건물을 지양한 결과가 제주 충신교회다. 성만교회 역시 일반적인 교회의 해법에서는 벗어나 있다. 교회건축이라면 상징으로부터 출발하고 해석하는 시대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재관 씨의 추구하는 바가 순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만교회에서 4층의 옥상정원이 비워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무 한 그루쯤 있을 법한 공간이지만, 그는 목적의 공간을 두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것은 건축에 굳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그의 경향으로 해석된다.

순수에의 추구 때문일지, 그의 건축은 세련된 맛이 없다. 툭 터놓은 천창 역시 단지 빛이 쏟아질 뿐이다. 한번쯤 손댈 법한 계단 핸드레일도 그리 특별하지 않다. 차라리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재료의 사용이다. 성만교회의 벽체 사이공간에 있는 노대는 발판뿐만 아니라 난간까지 우수관의 덮개로 사용되는 스틸 그레이팅(steel grating)으로 만들었다.

여하튼 잡다한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 그의 건축은 추구하는 결과가 명확하다. 빈번한 천창의 사용은 그의 교회건축을 간결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천창을 통해 도심지 교회의 소음문제를 해결하고, 측창을 없애서 예배분위기를 경건하게 조성하며, 빛을 통해 신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창이 벽체에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수직창이나 장미창에 대한 건축주의 유혹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는 점은 복잡한 것보다 단순하고 정제된 표현을 추구하는 그의 작업에서 천창을 사용하게 되는 당연한 이유이다.

보여지는 사실들을 짧은 시간에 규정하고,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그의 장기다. 다소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그는 자신 앞의 현상들을 주워담고 정리하여 다시 쏟아낸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밀고 당기는 힘의 관계를 조율하는 데 능하다. 디자인은 권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그것은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어디에 힘이 집중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자기보호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건축으로 실현하기까지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기실 건축이나 디자인만이 권력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은 힘의 분포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해묵은 명제도 이 경우에 유효하다. 어떤 건축가는 좋은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코디네이션(coordination), 즉 그 건축에 관계된 사람들을 잘 조율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나의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서 참여하고 관계하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파악해야하는 건축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김재관 씨는 그런 관계를 알고 있다. 이상과는 다른 현실 속에서 건축으로 밥을 벌어먹고, 그럴 듯한 건물 하나 내어놓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그야말로 둔탁한 그의 건물이 우리 앞에 선을 보일 수 있는 것은 그의 건물이 진솔한 표현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힘의 관계를 잘 조율한 결과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단순화한 기능에 꾸미지 않은 질감이 그의 건축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라면 드러나지 않는 일련의 과정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리얼리티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가. 진실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그 성취의 수준을 차치하고 좋은 건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