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기고, ‘그냥 살란다’, 건축웹진 Archforum 릴레이 칼럼, 2002

An Article, ‘I will live the way I am’, Webzine Archforum, 2003

그냥 살란다

김 재 관

*사진가 박영채는 건축에 혼신을 다하고 있어 아름다워 보이는 건축가라고 나를 말한다. 얼굴 붉어지는 소개이다. 혼신이라는 말이 그렇고 건축가란 말이 특히 그러하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나는 나 스스로를 건축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자연스럽지 못하다. 원도시 건축에 있는 한 후배는 이름 앞에 건축가라고 쓰인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그 후배가 내미는 명함을 보고 난 사실 쑥스러워 했었다. 그가 학교를 마친후 설계사무실 2.3년차 정도였으므로 건축가라고 부르기에는 경험과 나이가 모자라다고 여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나도 이전에 건축가라는 타이틀을 이름 앞에 넣은 명함을 만든 적이 있었으나 그것이 내 지갑을 이탈하여 남에게 건넨 적이 한번도 없었던 숫기 없음에 비하면 주저없는 듯한 그의 태도에서 난 주눅 비슷한 것이 들었나 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자기를 화가라고 소개한다거나 어느 육군병장을 군인이라고 부른들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내가 건축가란 명사를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 내가 좋아했던 것들 중의 하나는 친구들과 하릴없이 종로거리를 배회하거나 사람 많은 곳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며 그 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몸짓과 생김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 사람들이 걸치고 있는 자켓의 줄눈을 헤아리고 나팔바지의 폭을 가늠하고 정작 나와 관계없는 수 많은 사람들이 신고 다니는 구두가 깃도 가죽이다 혹은 아니다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돈암동이나 혜화동에선가 나와 늘 동행하던 친구가 나에게 진지한 물음을 던졌는데 그것은 뜻밖에도 꿈이 뭐냐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가 갖는 보통의 관심은 꿈이 아니라 옷가지나 머리 스타일 따위의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장난삼아 그럼 네 소원은 뭐냐고 되물었을 때 그는 독립군 같은 눈을 뜨고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도장찍듯 말했다. 난 그때 이 친구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을 지가 한편 궁금했지만 그야말로 꿈이었으므로그저 웃고 말았었다. 노래방에서 누가 십팔번을 물으면 늘 망설이는 나로서는 아직까지는 누구도 궁금해하거나 묻는이 없지만 건축을 어떻게 시작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를 위해 공연히 답을 준비한 적이 있다. 어떤 이는 미술보다 건축이 인간을 더 이롭게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조각가의 씨내림이 옆으로 어긋나 건축가의 길을 걸었다는 등의 멋진 동기들을 나도 갖고싶었기 때문이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굳이 근거를 찾는다면 나의 씨앗은 아무래도 돈암동의 골목의 어느 곳에서 친구에 의해 씨가 잉태된 것 같다. 그때 나에게 최초로 날아 들어온 건축가라는 낱말 속에서 느껴지는 음색이 한 가닥 있었는데 그것은 피아노의 고음에서 느껴지는 명료함의 그것이다. 건.축.까…. 똑 떨어지는 단음들이 서로 모여진 말이 아닌가.

어느 일본 소설의 제목을 간판으로 내건 이대 근처의 선술집에 한 건축가를 따라 갔었다.그는 그곳에 이미 있던 이들에게 나를 건축가라고 소개했었다. 최초로 건축가라는 타이틀이 내 이름의 앞에 걸린 날이었다. 사실 나는 건축가라기보다는 그 건축가를 돕는 조수였고 건축사협회에서 부과된 공식 명칭도 보조원 또는 보조사였다.( 난 지금도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고 싶을 때 스텦을 향해 보조사라고 부른다) 사진가 박영채의 나에 대한 헐거운 소개처럼 그 건축가도 술김에 그렇게 말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보조사라고 소개하면 그들이 대번에 알아듣지 못할 성싶어 그랬거나 마땅한 말이 없어 별생각 없이 그렇게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난 그날 잔뜩 고무되었고 그로부터 나에게 부여된 그 타이틀을 마치 기사 작위인듯 여기고 싶어했었다. 융통성 없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사무소를 열고 6년 동안 스무채 정도의 집을 설계하고 열 채쯤의 집이 지어졌다. 그 중네 채가 개신교 예배당이며 다섯 채는 제주도에 있다. 그래서인지 날 제주도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혹시나 주택도 설계할 줄 아느냐고 묻는 사람까지 있다. 하기는 지금 하는 일도 예배당이니 이것도 운명인가 싶다. 혼신을 다하지 않으면 그나마 예배당 일감도 나에게 맡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난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고, 보고서를 만들고, 시방서도 꾸리고, 현장에도 나가야 되고, 집주인 설득도 해야되고, 더러는 허우대만 멀쩡한 목사에게 핏대를 올려야되고, 보 뎊스를 좀 작게 해달라고 구조에 사정도 해야하고,전기세를 계산할때도 나는 혼신을 기울인다.그런데……… 이런 정도의 혼신은 거의 누구든지 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저 나에게 부과된 것들을 부지런히 또는 가까스로 해결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은 혼신이 아니라 사실상 일상으로 보는것이 더 가깝지 싶다.

일년 남짓의 시간을 집 한채를 설계하면서 가계와 체력과 의지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난 진정 혼신을 다 하고싶었다. 그런데 그 혼신의 결과는 좋은 집으로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나의 허리로 왔다.

허리는 단면이 끊긴 듯 아팠고 난 맥없이 바닥을 허위적 거렸다. 원래 허리가 좀 안 좋은 줄로만 여겼는데 시인 함성호는 아주 잘 아는 놈을 바라보듯 스트레스가 원인이며 이제 그곳으로 길이 났으니 힘들면 또 그럴 거라며 시인처럼 진단했고 거기에 덧붙여 죽을 수도 있다고 판사처럼 선고했다. 천문학을 전공했다는 어떤 한의사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그랬다고 했다. 기분이 나빠 그 후로는 담배를 안 피운다. 나의 선생은 생각을 너무 쥐어짜서 그렇다고 한다. 좀 비위가 상하기도 하지만 그 예리한 칼끝은 내 심장을 향했다. 혼신의 결과가 허리로 오는 것— 이 놈도 혼신은 아니다.

그러다 진짜 혼신을 다할 수 있는 일을 드디어 만났다. 한 마디로 니 맘데로 하라니 날개에 젯트 엔진까지 달은 기분 아닌가. 신나게 여섯달을 유영했다. 혼신의 결과라고 믿고 싶지 않아서 다시 여러 번 혼신을 다했고, 절대 혼신이 아니라고도 했고, 잠정적인 것이라고 또 여러 번을 위로했고, 그러다 겁이 나면 산으로 달아나기도 했고 비디오방으로도 갔다. 그래선지 그 결과는 제법 빛나 보였다. 사디스트처럼 난 흥분되었고 바로 이놈이 혼신인가보다 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너무 혼신을 다했는지 협정이 깨진 것이었다. 아이고.

요새의 일이다. 먼 울음소리처럼 허리가 또 다시 아파 온다.

사실 혼신이란 이렇게 악을 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때가되면 그것을 난 금새 잊고 눈을 또 부라릴 것이며 내 언어를 난사하듯 소진할 것이다. 그리고 또 기진한 몸으로 산으로 갈 것이다.

이건 내 일상이다. 아무리 도달하고싶은 마음이 간절하더라도 혼신(渾身)이란 낱말이 지니는 사전적 의미는 나에게 타인을 요구하는 듯 하여 무겁고 너무 많은 갱신이 필요하므로 거북하다. 그러므로 난 혼신을 다하는 건축가가 되지 않겠다. 난 혼신을 모르기로 한다. 다시 허리가 아플망정 그냥 살란다.

얼마전 내 마음에 닿는 언어를 한 소설에서 찾았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 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낸다. 생사의 쓰레기는 땅 위로 널리고,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다 ・・・・・・ 한 것이며 ・・・・・・ 또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낮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그의 말을 융통성 있게 잘만 알아들으면 앞으로 몇 번정도는 분질러지는 허리를 구원할 방도가 되겠구나 생각이 든다. 한동안 믿어볼 참이다.

 

다음 필자는 건축가 유걸이다. 나는 그 건축가를 거의 모르며 나이도 스무살 가까이 위다. 나는 걸이라는 어휘에서 느껴지는 호방한 이미지를 다만 좋아했는데 그의 건축 공간에서 그 실체를 만났었다. 그것은 나의 통찰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이의 선명함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스펙트럼 같은 눈빛과 구레나룻에서 이어지는 짧은 목의 단호함과 끊어 치는 듯한 화법은 모두가 하나인 듯 느끼게 한다. 이러한 예측의 끝을 또 다르게 기대하며 바통을 넘긴다.